무엇인가 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재원 : 1. 전체에서 존재의 개념으로

카지노 : 지금까지 우리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기본적 성격과 그런 학문이 태동하게 된 정신적 지평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개별 과학은 삼라만상 가운데 일부분을 떼어 그것의 원인을 고찰한다면, 형이상학은 전체의 원인과 근거를 탐구하는 보편 학문입니다. 이 학문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적 인식을 지향하지 않고 반대로 이 학문이 그 자체로서 자기 목적적이라는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자유로운 학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자유로운 학문의 이념이 어떤 의미에서 자유인의 공동체에서 태동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형이상학이 탐구한다는 그 ‘전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일 것입니다. 또는 같은 물음을 이렇게 달리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도대체 한갓 개인에 지나지 않는 내가 어떻게 전체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개별 과학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물음을 물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이 물체를 탐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어떤 물리학자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를 하나하나 탐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어떤 물리학자도 물체 전체를 탐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생명체를 탐구하는 생물학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생물학자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하나하나 남김없이 연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물학자는 당연히 생명체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물학자가 생명체를 전체로서 탐구하고 물리학자가 물질을 전체로서 탐구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같은 생물학자라도 누구는 동물을 연구하고 누구는 식물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물리학자라도 누구는 미시의 원자를 연구하고 누구는 천체를 연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분하더라도 때마다 모든 학문은 그렇게 구분된 영역에서 전체를 탐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이 실험실에서 관찰하고 실험하는 탐구 대상은 특정한 하나의 물체이고 생명체이겠지만, 그들이 그런 개별적 실험대상을 통해 알아내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물체나 생명체 전체에 대한 보편적 인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개별자로부터 그 개별자가 속하는 대상의 부류 전체에 대한 인식을 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아마도 물리학자가 연구하는 것은 개별적 물체 속의 보편적 물질성 또는 물체성이요, 생물학자가 연구하는 것도 개별적 생물체 그 자체가 아니라 개별적 생물체 속의 보편적 생명현상이라고 우리는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별적 물체가 모두 같이 공유하고 있는 물체성 그리고 개별적 생명체가 모두 같이 공유하고 있는 그 보편적 생명이 생명체를 전체로서 그리고 물체를 전체로서 인식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각각의 전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전체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전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물리학자가 물체를 탐구하고 생물학자가 생명체를 탐구하는 것과 달리 형이상학자는 이것저것 구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탐구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철학자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남김없이 연구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전체를 탐구하는 것이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형이상학이란 영원히 불가능한 학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모든 개별 과학이 연구한 연구성과들을 남김없이 습득하는 것이 전체를 연구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런 것이 철학이라면, 오늘날 인류가 얻어낸 모든 대상에 대한 모든 정보와 인식을 입력받아 저장하고 있는 슈퍼컴퓨터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학문이 알아낸 지식을 그저 외적으로 총합하여 전체를 안다고 말한다면, 이런 의미에서 전체에 대한 학문이란 결코 독립적 대상을 지닌 고유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형이상학이 그런 의미의 보편 학문이라면, 예전으로 말하면 백과사전이 형이상학일 것이고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챗GPT 같은 인공지능이 형이상학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농담으로나 할 수 있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농담이 아니라면, 형이상학이 탐구한다는 그 전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방금 우리는 생물학자로 하여금 생명체 전체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물리학자로 하여금 물체 전체를 연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모든 물체에 공통된 물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자가 전체를 탐구할 수 있기 위해서도, 생명체든 물체든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전체로서 탐구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전체의 전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주는 그 전체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존재(being)입니다. 쉽게 말해 있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주는 전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로 종류가 다른 것들을 아무것이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를테면, 내 앞에 있는 책상, 그 위에 있는 책, 창밖에 보이는 나무,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 위에 앉은 한 마리 나비, 멀리 보이는 하늘, 하늘에 떠있는 구름, 구름을 몰고가는 바람, 서쪽으로 지는 해, 그리고 동녘 하늘에는 일찍 뜬 보름달. 이런 것들은 모두 서로 다른 것들입니다. 책상을 만드는 목수는 책상에 대해서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책을 쓰는 일까지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로 책상을 만들 줄 안다고 해서, 식물학자처럼 나무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요. 이런 사정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달과 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것들이고 그것들 각각을 알기 위해서는 각각의 대상을 위한 특별한 인식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것들을 이렇게 보면 어떻습니까?

책상이 있다.

사람이 있다.

하늘이 있다.

나무가 있다.

나비가 있다.

태양이 있다.

반드시 눈에 보이는 물체만 열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삼각형이 있다.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다.

신이 있다.

시간이 있다.

공간이 있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이 목록에 이어붙여도 됩니다. 그런데 주어의 자리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른 것들이지만 ‘있다’는 술어는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다른 것을 우리가 상상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신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에 속하겠군요. 하지만 없는 것은 어차피 없는 것이니까 처음부터 전체의 범위 안에 들어올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기야 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을 믿는 사람은 많이 있고 그런 사람의 생각 속에 신은 있을 테니, 우리는 다시 신이 생각 속에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군요. 삼각형의 이데아도 마찬가지겠지요. 플라톤이 생각했던 이데아가 정말로 있든 없든, 우리는 삼각형의 이데아를 거론하는 순간 그것은 적어도 우리의 생각 속에 그리고 우리의 말 속에 있습니다. 누군가 ‘삼각형의 이데아 같은 것은 없어요’라고 말할 때도, 최소한 그 이데아는 생각 속에서 또는 그것을 부정하는 말 속에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으로 있든지 간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형이상학이 삼라만상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학문이라면, 이제 그것은 존재에 대한 학문일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표현하여 형이상학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그리고 그것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어떤 학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별학문들 가운데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다른 학문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보편적으로 탐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학문들은 있는 것의 한 부분을 떼어내어 그것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데, 예컨대 수학적인 학문들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 조대호 옮김, 『형이상학』, 4권 1장]

첫 문장에서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고찰한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자를 물체인 한에서 고찰할 수도 있고 생명체인 한에서 고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에는 물체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을 고찰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생명체에 그 자체로 속하는 것을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물체를 물체인 한에서 연구하고 또 물체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물체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체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어떤 생물학자는 생명체를 식물인 한에서 연구하기도 하고 어떤 생물학자는 생명체를 동물인 한에서 연구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누군가는 생명체를 단적으로 생명체인 한에서 연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체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성질들을 이론적으로 연구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사정은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연구하는 형이상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체도 있는 것이고 생명체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리학자는 물체를 있는 것인 한에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물체인 한에서 물체를 연구합니다. 생물학자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형이상학자는 있는 것을 단적으로 있는 것인 한에서 연구합니다. 이 경우 있는 것의 모든 차이는 고려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있는 것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모든 것은 도외시하고 단지 그것이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학문이 형이상학인 것입니다.

2. 있는 것과 있음의 차이와 공속에 대하여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묻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이론적으로 고찰한다고 할 때, “있는 것”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토 온”(to on)입니다. 영어로는 being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있다’는 동사를 명사화시킨 것으로서,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있음 그 자체, 즉 있다는 사실 자체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고찰한다고 말할 때, 그가 고찰하는 것이 명사로서의 있는 것 또는 존재자일까요, 아니면 동사로서의 존재 즉 있다는 사실 자체일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가 여기서 물어지고 있다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고찰한다는 말에서 보듯이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대상은 일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고찰한다고 할 때, 그 있는 것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다른 어떤 속성도 아니고, 단적으로 그것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이 있는 것을 오직 있는 것으로서 고찰할 때, 그것이 고찰하는 것은 있는 것의 있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있다’는 사태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고유한 성질이 어떤 것인지, 그런 것을 묻는 것이 형이상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있는 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만약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있음도 없을 것입니다. 있다는 것은 언제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있는 것이지, 그냥 ‘있다’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있다’는 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아니면 ‘있다’는 생각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조차, 말과 생각이 있는 것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언제나 있는 것의 있음이지, 그냥 있음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있는 것’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있는 것’ 역시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있는 것’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있다’는 사태는, 마치 삼각형이 세 변을 가지는 것처럼, 있는 것에 그 자체로서 귀속하는 본질적 속성이 아닙니다. 삼각형이 세 변을 가진다는 사실은 삼각형이라는 존재자와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 개의 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삼각형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있다’는 사실은 ‘있는 것’에 분리불가능하게 귀속하는 속성이 아닙니다. 지금 있는 것도 나중에는 없어질 수 있고 또 실제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왜 없지 않고 있는지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월의 어린이도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라고 물었던 것이지요. 자기가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있지 않고 없었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므로 있는 것과 있음은 한편에서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이 공속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인 같은 것은 아닙니다. 있다는 것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있는 것은 있음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있음이 깃들여 있지 않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있는 것은 언제나 있음을 통해서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있는 것과 있음은 분리할 수 없이 공속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있음이 곧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곧 있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 둘이 이름만 다를 뿐, 실제로는 하나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명사이고, 다른 하나는 동사에 대응하는 사태입니다. 그리고 명사와 동사가 결합할 수도 있고 분리될 수도 있듯이, 있는 것과 있음은 결합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합니다. 물론 있는 것과 있음이, 동사와 명사가 분리되어서도 스스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있음이 분리되어 따로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있음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있는 것이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은 그 있는 것과 있음이 모두 같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있는 것과 있음이 그 자체로서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만약 그 둘이 그 자체로서 하나요 같은 것이었다면, 있는 것은 결코없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각형이 세 개의 변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삼각형을 삼각형이 되게 해주는 본질 속에 세 개의 변을 가진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삼각형이 삼각형인 한에서 삼각형은 세 변이 아닌 다른 개수의 변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있음과 있는 것 사이에는 이런 동일성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든 있는 것은 없었을 수도 있는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음 순간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지금 있다고 해서 다음 순간에도 계속 있을 수 있는 필연성을 자기 속에 담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있음은 삼각형의 세 변처럼 있는 것과 그 자체로서 하나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세 각을 가진 도형과 세 변을 가진 도형은 말이 다를 뿐 실제로는 같은 것이지만, 있는 것과 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삼각형은 다음 순간에 변이 세 개가 아니라 네 개인 도형이 될 수 없지만, 있는 것은 다음 순간에 있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분리불가능한 것으로 공속하는 있는 것과 있음이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의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존재의 자기거리라고 부르려 합니다. 존재는 평면이 아니라 깊이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어떤 거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남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있음을 통하여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나를 있게 하는 나의 있음이 나 자신에게 타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남이라는 이런 상황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처럼 있는 것이 있음과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그 자체로서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존재의 근원적 현상이라는 것만 말해두고 넘어가려 합니다. 여기서 존재의 원(原)현상이란, 더는 그 현상의 배후를 추적해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가 평면이 아니라 깊이인 까닭, 즉 존재의 자기거리의 근거를 더 물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묻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자기거리 속의 존재 지평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가 평면이 아니라 깊이인 것을 다만 내재적으로 분석하고 서술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은 그런 존재의 원현상으로서 존재의 자기거리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반복해서 존재의 자기거리를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3. 있음과 무엇-임의 같고 다름에 대하여

존재[자]의 자기거리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큼이나 근원적인 존재[자]의 자기거리가 또 있는데 그것이 ‘있다’는 의미의 존재와 ‘이다’는 의미의 존재 사이에 성립하는 자기 거리입니다. 이를 위해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존재[자]를 소환해 봅시다. 그리스어에서 존재[자]를 의미하는 ‘토 온’(to on)이라는 낱말이 영어의 the being에 해당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영어의 be동사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This is a book.이라고 말할 때처럼, ‘이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There is a book.이라고 말할 때처럼 ‘있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있다’와 ‘이다’는 아예 품사 자체가 다른 낱말입니다. ‘있다’는 동사로 간주되지만, ‘이다’는 조사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 서양 언어에서 영어의 be동사에 대응하는 존재 동사는 ‘있다’의 뜻과 ‘이다’의 뜻을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그리스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있는 것이나 ‘있다’는 사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인 것이나 ‘이다’는 사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서도 존재[자]는 또다시 자기거리 속에 빠져듭니다. 왜냐하면 한편에서는 하나의 언어[to on]로 표현되는 존재 사태가 내용적으로는 ‘있다’와 ‘이다’라는 명백히 구별되고 또 구별해야만 하는 두 가지 존재 사태로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서 ‘있다’는 말과 ‘이다’는 말은 명백히 구별되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이 가리키는 객관적 사태가 서로 다른 사태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이런 사정은 ‘봉황은 새의 일종이다’라는 말과 ‘봉황은 실제로 있다’는 말을 비교해보면 금세 드러납니다. ‘봉황이 새의 일종이다’라는 말 속에는 ‘봉황이 실제로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의 말은 봉황이 무엇인지를 말해줄 뿐,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뒤의 말은 명확히 봉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뒤의 말은 봉황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말만 가지고서는 봉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있다’와 ‘이다’라는 말은 이처럼 다르며, 그 말이 가리키는 객관적 사태도 당연히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가지 사태가 마냥 서로 무관한 것들로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것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다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봉황은 새의 일종이다’라는 말에서 ‘새의 일종’이라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봉황은 … 이다.’에서 … 의 자리에 아무것도 들어갈 수 있는 말이 없다면, 봉황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은 무(無)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어떤 것이 있는 것이라면 어떤 의미로 있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어떤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라고도 규정되지 않고 전적인 무규정상태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다’라는 규정성이 전적으로 부정되면, ‘있다’라는 사실 역시 부정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있다’와 ‘이다’는 분리할 수 없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있다’는 것과 ‘이다’는 것은 엄연히 의미가 다르고 서로 지시하는 객관적 사태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가지 사태는 하나의 존재 사태 속에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의 존재 사태가 자기 자신 속에서 ‘있다’와 ‘이다’라는 서로 다른 사태로 분열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 역시 앞서 말한 존재[자]의 자기 거리의 또 다른 양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랜 서양 철학의 역사 속에서 ‘있다’와 ‘이다’의 관계를 따지는 것은 형이상학의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둘 중에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는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더러는 ‘있다’보다 ‘이다’가 앞선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더러는 ‘있다’는 것이 ‘이다’보다 앞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런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으려 합니다. 형이상학을 소개하기 위한 이 강의에서 우리는 ‘있다’와 ‘이다’가 서로 다르면서도 공속하는 근원적 존재 사태이며, 그리고 여기서도 존재의 자기거리가 드러난다는 것만 확인하고 넘어가면 될 것입니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4. 생각 속에서 열리는 있음에 대하여

그런데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서든, ‘있다’와 ‘이다’ 사이에서든, 존재의 자기거리를 생각하려 할 때 생기는 물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려면 일단 생각해야 할 대상을 어떤 식으로든 알아야 할 터인데, 우리가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우리는 집이 있다거나 차가 있다고 말할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런데 막상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묻는다면 어떻습니까? 안다는 것은 무언가 설명할 수 있다는 건데, 있다는 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나요? 이렇게 묻기 시작하면 갑자기 막막해집니다. 있다는 것이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이것이 있음이다’라고 가리킬 수도 없으니, 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내 앞에 장미꽃이 한 송이 있습니다. 나는 그 꽃의 꽃잎을 봅니다. 붉은색입니다. 줄기는 가늘고, 색은 초록색입니다. 가지에는 이파리가 나 있고, 작은 가시도 보입니다. 나는 그것의 색깔과 형태를 눈으로 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 내가 장미꽃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있다’는 말이 지시하는 것 또는 있다는 말에 대응하는 감각 내용이 과연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장미의 색깔도 형태도 그것 자체가 있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장미꽃의 붉은색이고 꽃의 형태이지 꽃의 있음 자체는 아닙니다. 물론 꽃잎도 있는 것이고 색깔도 있는 것이고 형태도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고, 그 모든 것에 있음이 깃들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붉은색이 있음 자체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붉은색이 있음이라면 푸른색은 있음이 아니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붉은색도 푸른색도 모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붉은색과 푸른색을 모두 포괄하기는 하지만, 있음 자체는 붉은색도 푸른색도 아닙니다. 당연히 형태나 다른 어떤 성질도, 바로 그것이 있음 그 자체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있음 그 자체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습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그리고 잡히는 것이 모두,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있음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데, 어떻게 우리는 장미꽃이 한 송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까? 그것은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는 것을 넘어가는 어떤 정신의 파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능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존재 이해의 능력입니다.

단지 내 눈 앞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능력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유일하게 인간에서만 존재가 그 자체로서 자기를 열어보인다는 점에서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존재(Sein/Being)가 거기서(da/there) 자기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인간 존재 속에서 존재가 자기를 알리고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특별하고도 고유한 본질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인간 현존재는 존재와 같은 것을 이해한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 양식 자체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그런 존재자이다.” 하이데거, 김재철 옮김,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 39쪽]

하지만 이처럼 인간 현존재가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앞서 말했듯이, 있다는 것이 감각 내용으로 직접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것은 정신을 통해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는 생각되는 것이지 보이거나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존재가 정신을 통해 생각되고 이해된다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존재의 정신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의 정신성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습니다.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28B3]

만약 여러분이 이 말을 두고 내가 빵이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빵이 있게 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 있는 것이 같다는 말인가?라고 되묻는다면, 저 말의 의미를 오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의 저 말은 빵이나 밥 같은 사물과 생각된 관념이 같다는 뜻이 아니고 있음과 생각함이 같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존재자와 관념이 같다는 말이 아니고 있음이 오직 생각으로서만 일어난다는 것이 저 말의 뜻입니다.

이처럼 생각과 있음의 근원적 동일성은 서양 철학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불교에 관심이 있다면, 아마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흔히 『화엄경』의 근본 사상을 요약한 것이라고 하는 저 말은 만물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표현이 똑같지는 않지만,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말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둘 다 생각과 있음의 근원적 일치와 동일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처럼 생각과 있음의 근원적 일치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존재를 그 자체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존재가 생각과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생각을 통해 존재를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이 있음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생각함으로써 있음을 이해하고 또 인식할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생각과 있음의 근원적 일치는 형이상학 자체의 가능성의 근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이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을 묻는 학문이라면,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이 가능하기 위해 먼저 있는 것의 있음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의 있음이 오직 생각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고, 더 나아가 있음이 생각과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제 우리는 생각 속에서 있음의 진리를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물음은 남습니다. 생각이 무엇이기에 그 생각의 지평 속에서만 존재가 열리는 것일까요? 어떤 특별한 본질이 생각으로 하여금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것처럼 있음과 같은 것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일까요? 생각하면 이 물음이야말로 동서양을 통틀어 형이상학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가장 고전적인 대답은 신이 존재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우리는 원효 식으로 만물의 근원이 일심이라 말할 수도 있고, 유식불교 식으로 아뢰야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절대자가 정신이라면, 그 절대적 정신 속에서 존재도 정신적일 것이요, 그로부터 펼쳐지는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들의 존재 즉 있음도 정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피타고라스 이래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수학적 존재론을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존재 원리가 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갈릴레오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은 수라는 글자로 쓰인책과 같은 거지요. 그리고 데카르트는 존재하는 모든 물체가 기하학적인 형상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물체의 존재는 기하학적 형상이고 기하학적 형상은 다시 대수학적 규정으로 표현할 수 있으므로, 사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구체적 존재자들은예외 없이 수학적 규정으로 환원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학적 규정들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이성적 생각의 표현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세계를 수학적으로 인식하고 기술할 수 있는 까닭은 세계가 수학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계가 이성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성의 일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수학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이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성의 일이 생각함이라면, 세계는 생각의 지평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과학적 관점에서도 있음과 생각이 같다는 것이 결코 뜻 없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수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공리체계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세계가 수학적인 질서와 법칙에 따르는 것일까요? 하기야 수학까지 갈 것도 없이, 존재는 이미 우리의 언어 속에서 자기를 드러냅니다. 수학적 언어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추상화된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존재는,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언어 속에 머무르고 거주합니다. 이것을 시적으로 표현해서 하이데거는 「휴머니즘 서간」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이데거, 이선일 옮김, 『이정표 2』, 124쪽]

그러니 언어라고 하든 수학이라고 하든 아니면 언어를 사용하는 이성이라고 하든, 존재는 생각 속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생각이 무엇이기에, 과학적으로 생각하든,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든, 있음이 생각 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것일까요? 형이상학을 전체로서 소개하는 이 강의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있음과 생각의 본질적 일치가 존재의 근원적 현상으로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가능성의 근거이며, 모든 진리의 토대라는 것만 말해두고 넘어가려 합니다. 진리가 생각과 있음의 일치를 뜻한다면, 생각과 있음의 근원적 일치는 그 자체로서 근원적 진리의 표현과 실현일 것이며, 개별적인 존재와 그에 대한 생각의 일치라는 구체적인 진리의 가능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존재가 그 자체로서 진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있음의 일치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이 그 자체로서 생각과 같은 것이라면, 있음은 그 자체로서 진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이 근원적 진리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파생적 진리의 근거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 속에서 모든 개별적인 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이처럼 있음이 근원적으로 생각과 동일하고 생각 속에서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5. 하나와 여럿에 대하여

있음과 생각 그리고 진리가 뗄 수 없이 공속한다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도 되겠습니다. 그는 형이상학을 가리켜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그리고 그것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어떤 학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있는 것이 있는 것인 한에서, 그것에 그 자체로 속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다시 생명체를 연구하는 생물학을 생각해 봅시다. 동물도 생물이고 식물도 생물입니다. 그러나 동물과 식물은 다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어떤 생명체를 동물인 한에서 고찰한다면 식물이 아닌 동물이 가진 특성들을 연구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런 사정은 어떤 생명체를 그것이 동물이 아니라 식물인 한에서 연구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생명체를 동물이나 식물로서가 아니라 단적으로 그것이 생명체인 한에서 연구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경우 우리는 그 생명체를 보편적 생명현상의 한 사례로서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체를 통해 보편적 생명현상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을 연구하게 되겠지요. 쉽게 말해 생명 현상의 보편적 본질 또는 보편적 고유성을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형이상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물체나 생명체가 아니라 존재자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고유성이 탐구됩니다. 어떤 것이 있을 때, 과연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서 어떤 고유한 특징을 지니는 것인지를 묻는 학문, 쉽게 말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묻는 학문이 형이상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물학자들이 생명체가 지닌 고유한 특성들을 연구하듯이 형이상학자는 있는 것이 있는 것인 한에서 그 자체로서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들을 탐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물학 교과서를 본다면, 으레 생명체의 고유성으로서 생장한다거나, 신진대사를 한다거나, 내외로 움직인다거나, 외부 자극에 반응한다거나, 자기와 같은 것을 낳는다는 특징을 듭니다. 또는 모든 생명체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든지, 특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특징을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구상이 아니라 어디엔가 있을 수도 있는 다른 모든 생명체도 탄소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많은 생물학자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이것을 수학적 또는 논리적 증명을 통해 명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더러는 탄소가 아니라 다른 원소를 토대로 형성된 생물이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 있는 것이 있는 것인 한에서 그것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고유성이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있다’라고 할 때, 그것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고유성이나 징표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서양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이 상투적으로 입에 올리던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요, 참되며, 좋다.”

우리는 물체는 무엇이든지 간에 크기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명체는 무엇이든지 간에 생명을 가진다고 생각하지요. 그렇듯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중세 철학자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형이상학의 초창기에서부터 모든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공리 같은 것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어떤 것’이라는 말과 ‘있는 것’이라는 말과 ‘하나’라는 말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은 모두 ‘하나’로서 있고 또 ‘어떤 것’(something)으로서 있는 거지요.

왜 그런지는 반대를 생각해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라면 그것이 과연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어떤 것으로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것은 때마다 어떤 하나로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있다면서 하나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것이 하나라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어떤 것이 있다면서도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지시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것은 어떤 테두리에 의해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테두리는 눈에 보이는 시·공간적 한계일 수도 있고, 의미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다고 말할 때, 그 정의(definition)라는 말이 한계(finis)를 정한다는 데서 온 말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한계는 어떤 것을 자기 외부와 분리해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내적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다른 것과는 구별되고, 자기에 속한 것들은 한데 묶여 있어,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으로 존재할 때, 그것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모든 있는 것은 하나로서 있습니다. 그것은 물체로서 하나일 수도있고, 생명체로서 하나일 수도 있으며, 형태로서 하나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 또는 개념으로서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의미의 하나는 자연수 가운데 첫 번째 수인 하나가 아닙니다. 물론 첫 번째 자연수인 하나도 하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수인 2도 하나의 수입니다. 당연히 3이나 4도 하나의 수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수가 하나의 수입니다. 즉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수조차도 모두 하나의 수입니다. 이처럼 다른 모든 존재자 역시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물음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는 앞에서 어떤 것이 하나라는 것은 그것이 외부의 것과 분리되어 있고, 내부의 요소들이 한데 묶여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어떤 있는 것을 하나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내적 요소들이란 ‘하나’가 아니고 ‘여럿’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은 아무 내용이 없는 것, 즉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 속에 여럿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모든 존재자는 또한 하나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자는 하나를 이룬 여럿 또는 여럿을 자기 속에서 결합시킨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자는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관해 존재가 여럿을 결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힘이면서, 하나 속에서 여럿을 빚어내는 힘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자가 여럿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여럿이라는 것도, 생각하면 존재의 자기거리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존재[자]의 의미를 밝힌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존재[자]의 자기거리의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빛이 우리의 육안에는 아무런 색이 없는 투명한 밝음으로 나타나지만, 프리즘을 통과하면 자기 속에 감추어져 있던 다양한 색상의 스펙트럼을 펼쳐보이듯이, 존재[자] 역시 아무 내용 없는 단순한 정립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속에 다양한 다름을 숨기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은 그 타자성(他者性)이 빚어내는 존재[자]의 자기거리를 드러냄으로써 감추어진 존재의 신비에 다가가려 합니다.

6. 범주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가리켜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그리고 그것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들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어떤 학문”이라고 말할 때, 있는 것에 “그것 자체로 속하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펴본 것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자]에 그 자체로 속하는 것들로서 제시하는 것 가운데 우리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범주(category)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종 “존재[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존재[자]가 여러 가지로 이해된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로 말해지고 또 나타나는 방식들 가운데 최고의 부류가 범주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존재[자]는 여러 범주적 규정들에 따라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송이 장미꽃이 내 앞에 있다고 합시다. 이 꽃은 그 옆에 피어 있는 다른 꽃과 구별됩니다. 이렇게 구별된 하나의 꽃은 실체라는 범주로 규정됩니다. 물론 그 장미꽃만 실체인 것이 아니고 그 옆에 핀 다른 꽃 역시 실체입니다. 당연히 꽃만 실체인 것이 아니고 그 꽃에 날아드는 벌과 나비도 실체입니다. 이처럼 다른 것과 분리되고 구별되어 존재하는 개별적 사물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고 부릅니다. 실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존재자라고 부르는 것, 또는 더 쉽게 개별적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전체 세계가 사물들의 총체라면, 또는 존재자들의 총체라면, 실체들의 전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자기거리는 여기서도 예외 없이 나타납니다. 실체는 그냥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존재자는 자기 속에 여럿으로 나뉘는 존재의 내용을 품고 있게 마련입니다. 가장 먼저 모든 실체는 일정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미꽃의 색은 붉은색입니다. 그리고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성질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질과 함께 그 꽃은 일정한 크기나 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미의 키를 잴 수 있고 무게를 달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장미는 일정한 성질과 크기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 성질과 크기가 다른 꽃과 다를 수는 있어도 아무런 성질도 없고 아무런 크기도 없는 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모든 실체가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질이 있고 크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실체의 범주 다음으로 성질과 크기의 범주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실체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디엔가 있고, 언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장소에도 없고, 어떤 시점에도 없다는 것은 그냥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당연히, 각각의 실체들이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간과 장소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실체에게 공통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언제’와 ‘어디’도 실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충족시켜야 하는 또 다른 범주적 규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물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정지된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와 운동 속에서 사물은 적극적으로 작용을 가하는 자리에 있기도 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작용을 받는 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능동과 수동 역시 모든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개별적 실체들과 그것들에 속하는 범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실체도 혼자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세계 내에는 무수히 많은 실체들이 있으므로, 그 실체들 사이에는 외적 관계가 성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체가 마지막으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존재[자]는 가장 먼저 실체로 나타나고 실체는 다시 양과 질, 시간과 장소, 능동과 수동을 통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이른바 범주들입니다. 그러니까 범주들이란 존재[자]가 자기를 실현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존재[자]가 여럿의 범주적 규정들 속에서 실현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범주 역시 존재의 자기거리의 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 서양 철학의 역사 속에서 범주는 역사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칸트의 범주론입니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이 엄밀한 원리에 입각해 찾아낸 것이 아니고 주먹구구식으로 주워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자기 나름의 범주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범주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대상을 생각하는 형식이므로, 범주는 형식논리학의 판단형식으로부터 이끌어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범주를, 분량, 성질, 관계, 양상이라는 네 개의 무리로 나눈 뒤에 각각을 다시 세 개의 범주들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열두 개의 범주를 제시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가 칸트가 비판했던 것처럼 아무 원칙이 없이 모아진 것이라고말하는 것은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과도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누가 옳은지 따지기보다는 둘 사이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시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가 존재 범주라면, 칸트의 범주는 생각의 범주라는 데 있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도 언어와 생각의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고, 칸트의 범주도 단순히 고립된 생각이 아니라 존재의 범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앞서 말했듯이 존재와 생각이 근원적으로 공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존재 범주가 동시에 생각의 범주일 수 있고 생각의 범주라 하더라도 동시에 존재의 범주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칸트의 경우 그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 자체의 범주가 아니라 대상 존재의 범주라고 말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자세한 사항 역시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겠습니다.

20세기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존재 범주도 사유 범주도 아닌, 실존 범주를 제시함으로써 범주론의 역사가 다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이데거는 존재가 거기서 열리는 특별한 존재자로서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실존이라고 불렀습니다.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장소가 현존재인 한에서, 현존재의 실존은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고유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 고유한 방식을 하이데거는 고전적인 범주에 대비시켜 실존 범주(Existentialien)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이 용어 속에는 범주라는 말 자체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존범주를 전통적 범주에 대비시켜 학자들은 으레 범주라는 말을 보태어 실존범주라고 번역합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면, 현존재가 세계 내 존재라는 것,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하이데거가 가장 먼저 제시하는 현존재의 실존범주입니다. 여기서 시작해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존범주를 분석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하거나 하나의 체계 속에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실존범주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소개하고, 범주의 역사가 형이상학의 역사와 함께 변화해 왔다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7. 존재 이해의 다양성에 대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존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존재의 자기거리를 열쇳말로 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왜 이런 것을 알아야 하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존재[자]의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일상의 삶이 위험에 처할 일은 없습니다. 존재[자]의 의미 같은 것 묻지 않고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잘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자]를 전체로서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근본적 태도가 바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두가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는 존재[자]의 의미를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보통 근대 철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정신과 물체, 둘로 나누었습니다. 이 둘은 존재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두 실체입니다. 이것부터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존재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나는 정신이지 육체가 아니라고 응수합니다. 정신은 존재하기 위해 육체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 실체입니다. 그에게 정신이 육체와 결합해 있는 것은 일종의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데카르트는 물체는 모두 죽어 있는 물질의 덩어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물체는 기하학적 연장(extension)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의 세계는 생각하는 정신적 실체들과 죽어 있는 물질들로 이루어진 전체가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신체도, 우리와 같이 살아 있는 동물이나 식물도, 본질적으로는 물질적인 것이라고, 그리고 기계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인간 정신을 제외한 자연 전체를 죽어 있는 물질의 총체로 본다는 것은 그 이후 과학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자연을 죽은 물질의 기계적 체계로 바라보는 관점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발전에 지대하게 기여했습니다. 시계수리공이 시계를 분해하듯이, 과학자들은 모든 것을 해부합니다. 그 해부 과정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은 시체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것을 죽임으로써 과학도 기술도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학적 인식의 발전의 끝에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인간의 정신도 죽어 있는 물질이 빚어내는 현상으로 해석합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 물질의 변모일 뿐이라는 존재 이해를 가리켜 우리는 유물론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여기서 유물론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는 않으려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질의 변모로 보는 유물론이 초래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침묵하려 합니다. 그 대신 존재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관점을 대비시켜 여러분이 이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려 합니다. 그 다른 관점이란 만해 한용운의 시에 나타나 있는 특별한 존재관입니다. 그의 시집 『님의 침묵』에는 대단히 심오한 철학적 생각을 담은 시편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의 시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의 존재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 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징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슬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출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한계전 편, 『한용운, 님의 침묵』, 서울대출판부, 41쪽]

시의 제목은 사랑의 존재인데, 여기서 시인은 사랑의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까닭이 무엇일까요? 사랑이 모든 것이므로 그렇겠지요. 전체니까 부분을 가리키는 언어로는 결코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사랑이 전체인가요? 그것은 사랑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거꾸로가 더 정확할 텐데 존재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시인의 넋두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닙니다. 『신약성경』 「요한1서」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존재의 주인인데,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존재가 사랑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이런 존재론에 따르면 존재의 근원이 사랑이니,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와 사랑의 표현과 실현으로 존재하다가 다시 사랑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만해의 말이 한갓 시적인 은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이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죽은 물질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세계관인지, 그것만 상기시키고 넘어가려 합니다. 우리가 존재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과 존재는 그저 죽은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을 전혀 다르게 채색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에서 온 우주가 사랑으로 충만한 전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함석헌의 말처럼, 싸움조차 모두 사랑 싸움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끔찍한 전쟁조차도 죄악의 세력이 그 속에 들어 있기는 하여도 역시 그 사랑의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머니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하여 그 품을 독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는 심술궂은 형제의 다툼질이다. 모든 악은 선의 뒷면이요, 모든 싸움은 다 사랑 싸움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97, 67쪽]

그러나 우주가 오직 물질의 변양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세계는 뭐라고 말을 하든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사막과도 같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철학은 그 자유로운 선택을 위한 길동무겠지요. 여러분의 길동무가 여러분의 삶을 보다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며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칩니다.